2019년 7월, 100년 전 우리나라 독립군들의 뜨거운 발자취를 따라 다니며 한 작업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다.
신흥의 의미는 신민회 '신'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희 '흥'자를 합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한다는 의미로 내포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서 독립지사들은 서간도 지역을 망명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했으며, 그 일환으로 1911년 5월경 유하현 추가가 대고산에서 노천회의를 개최하고 경학사를 조직 후, 1911년 6월 토착민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초기 학생은 약 40명이었고,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은 이철영과 이동녕이었으며, 본과 또는 원반과 군사학을 전수하는 특별반으로 나누어졌다.
이것이 신흥무관학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애국지사들은 유하현 삼원포에서 통화현 합니하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1912년 7월에 다시 오픈했다.
교사로는 여준, 김창환, 여규형 등이 활동하였고, 1914년 당시 생도수는 약 40명이며, 나이는 18~19세부터 24~25세까지였다.
이 곳에서 '신흥학우단'이라는 혁명결사단체가 결성되었으며, 신흥학우단은 1913년 3월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에서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 등과 신흥강습소 제 1회 졸업생인 김석, 강일수, 이근호 등의 발기로 조직 되었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자리는 한족마을로 변하였다.
3.1 운동의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를 찾는 한인 청년들이 많아지자 합니하 학교도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한족회가 고산자에 새롭게 교사를 짓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정식 본교를 개교하였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는 중등교육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였고 6개월 훈련코스와 3개월 훈련코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1개월 코스가 있었다.
신팔균, 이청천, 김경천 등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대한제국무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교관으로 임명되면서 더욱 활발한 군사훈련이 시행 되었다.
이와 동시에 쾌대모자에도 분교를 설치하게 된다.
교육은 본교와 마찬가지로 시행되었다.
현재 건물은 철거되고 없으며, 아파트와 채석 집하장이 들어서 있다.

나는 7월 26일에 중국에 도착해서 27일부터 추가가 옛터부터 시작해서 나섰다.
추가가 옛터를 답사 하고, 나는 그 다음 추가가에서 시작된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교사가 있던 곳인 고산자 옛터로 향했다.
원래 교사는 추가가 이후 합니하로 옮겼지만, 고산자 먼저 갔다.
나는 고산자로 가서 옥수수밭을 파헤쳐고, 또 헤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자리를 찾았다.
고산자 답사가 끝나고, 나는 두번째 교사가 있던 곳인 합니하로 향했다.

그리고 29일, 1919년 신흥무관학교 분교 중 하나가 있던 곳인 쾌대모자로 향했다.
옛터 땅을 밟았을때, 우리나라 독립군의 뜨거운 흔적을 밟고 있다는 그 순간 감회가 엄청 새로웠다.


Back to Top